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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

[해녀박물관] ‘저승에서 벌어 이승에서 쓴다’

by 피터 스토리 2022. 10. 20.

 


제주 ‘해녀박물관’, 시험에 나오지 않은 내용 총정리


 

성산포구로 향합니다. 가는 길에 세화해녀민속오일장을 구경합니다. 하지만 오늘 중요한 곳은 ‘해녀박물관’으로, 꼼꼼하게 관람할 생각입니다. 보통 제주도 해안도로 일주는 제주시에서 출발하여 애월, 서귀포시, 성산포항, 제주시로 이동합니다. 제주바다를 최대한 가까이에서 보며 일주하는 것이죠. 오늘은 그 반대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해녀; 작가 김상현, 2500mm, 현무암, 2011

 

해녀박물관은 세화포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구좌읍 세화리 백사장이 보이는 어촌 마을에 위치한 제주해녀박물관. 아직 가보지 않은 분이라면, 마치 현장에 간 것처럼 ‘해녀박물관’의 모든 것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내용 일부는 해녀박물관 홈페이지를 참고했음을 밝힙니다.

자, 이제 시작합니다.

 

해녀

기계장치 없이 맨 몸과 오로지 자신의 의지에 의한 호흡조절로 바다에 들어가 해산물을 채취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여성으로, 이들이 하는 일을 ‘물질’이라 부릅니다. 해녀들은 바다밭을 단순 채취의 대상으로 인식하지 않고 끊임없이 가꾸어 공존하는 방식을 택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획득한 지혜를 세대에 걸쳐 전승해왔습니다. 또한 해녀들은 바다 생태환경에 적응하여 물질 기술과 해양 지식을 축적하였고, 수산물의 채취를 통하여 가정경제의 주체적 역할을 한 여성생태주의자(Eco-Feminist)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농반어의 전통생업과 강력한 여성공동체를 형성하여 남성과 더불어 사회경제와 가정경제의 주체적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양성평등’의 한 모범이기도 합니다. 또한 제주 해녀는 19세기 말부터 국내는 물론 일본, 중국, 러시아 등 국외로 진출하여 제주경제영역을 확대한 개척자입니다.

 

 

쾌청한 날씨, 해녀박물관으로 들어갑니다.

 

자연과 인간의 공존

 

박물관에 들어서면 넓은 공간에 몇몇 전시물이 먼저 반깁니다. 알찬 관람을 위해서는 층별 안내도를 따라 동선을 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진 우측은 지새항,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 구워진 지새항은 통기성이 좋아 곡물을 오랫동안 보관하거나 식음수를 저장하는 용기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물을 담아두면 바깥 표면에 이슬이 맺히기도 합니다.

 

입구 전시장 한복판에 있는 제주여성의 삶이 깃든 ‘제주 옹기’입니다. 제주옹기는 곡물이나 식음수, 된장, 간장 및 젓갈류 등을 보관하는 그릇으로 제주여성의 삶과 매우 밀접합니다.

 

허벅과 물구덕
장항
젓독. 어패류의 살이나 내장에 다량의 소금을 섞어 숙성시킨 젓갈류를 보관하는 용기로 윗부분은 넓고 두터우며 밑이 좁은 것이 특징입니다.
장태. 요리하기를 즐기는 제가 가장 궁금했던 것 중의 하나입니다. 장태는 항아리의 뚜껑으로 음식을 만들거나 채소 씻기, 가공된 음식물을 임시 보관하는 등 아주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제1전시실; 제주해녀들의 생활

해녀의 집, 제주의 세시풍속, 해녀의 생활도구, 신앙 등 해녀의 생활을 전시한 공간입니다.

 

해녀의 집

제주의 초가는 자연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돌, 흙, 나무, 띠를 이용해서 집을 지었습니다. 강한 비바람을 이기기 위하여 초가지붕을 띠줄로 동여 메었고, 벽도 돌을 이용하여 쌓았으며, 울타리 역시 돌담으로 에워 쌓았습니다. 초가의 내부구조는 방, 상방(마루), 정지(부엌), 고광(광), 굴둑(난방시설)으로 나누었으며, 외부에는 마당, 장독대, 통시(화장실), 우영(텃밭)이 있습니다.

 

살림살이

해녀의 집에 전시된 유물들은 이남숙 해녀(1921~2008)가 사용했던 생활용품입니다. 이남숙 해녀는 일제강점기 제주시 구좌읍 평대리에서 태어나 한평생을 보냈습니다. 13세에 해녀에 입문하여 80세까지 물질을 한 상군 해녀였습니다. 23세에 김득수와 혼인했으나 제주4·3사건 때 남편을 잃었습니다. 어린 두 딸을 데리고 물질을 하며 억척같이 생활을 꾸려 나가면서 구룡포, 백령도, 남해 등 한반도 일대에 출가물질을 다녔습니다.

 

바다와 함께 삶을 엮어나가는 터전 ‘어촌마을’

제주의 어촌마을은 식수로 사용할 수 있는 용천수 이용이 쉬운 해안가에 취락이 형성되었습니다. 배를 쉽게 정박시킬 수 있는 포구를 중심으로 어촌이 형성되면서 도대불, 원담, 불턱, 노천 목욕탕 등이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외적의 침입을 막거나 강한 바닷바람을 막기 위해 환해장성을 쌓았습니다.

 

제주경제의 밑거름, 제주여성

제주여성들의 삶은 다른 지역과 다릅니다. 육지부는 내외가 구분되어 있어 여성들이 가정 살림을 맡고 남성들이 밖에서 일을 하였지만, 제주의 여성들은 집안일에서부터 밭일, 물질 등 경제적 활동을 하여 가정 경제를 지탱하는 몫까지 담당했습니다. 딸이 7~8세가 되면 바다에 나가 물질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물이 귀해 새벽에 물허벅을 지고 물을 길어 오는 일을 거들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제주여성들의 일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물을 길어오고 밭일을 하며, 물때에 맞춰 바다에 나가 물질을 하는 등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이 일을 했습니다. 이러한 제주의 여성의 근면성은 제주의 척박한 자연환경을 이기고 가족을 지키기 위한 길이었으며 현재 제주도를 키운 밑거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주의 세시풍속

제주의 어촌마을은 바다와 관련한 세시풍속이 발달하였으며, 타 지역의 영향을 적게 받아 제주만의 독특한 세시풍속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바람과 섬을 덮고 있는 현무암, 그리고 해녀들의 강인한 삶과 어로방법은 독특한 해양문화를 이루어냈습니다.

 

해녀의 생활도구

제주여성의 옷
갈옷

갈옷은 물이 귀한 제주에서는 그 색깔이 제주 흙 색깔과 비슷하여 더러워져도 쉽게 눈에 띄지 않으며, 더러움도 덜 타고 빨면 때가 잘 빠져 애용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땀에 젖은 옷을 그냥 두어도 쉽게 썩거나 상한 냄새가 나지 않아 제주의 자연환경에 맞는 최적의 조건을 구비한 옷입니다. 감물 들이기는 음력 칠월 칠석을 전후하여 풋감(제주도 토종감)을 이용하며, 물들인 천은 햇볕을 골고루 받아야 고운 빛깔을 냅니다. 갈옷은 수명이 다할 때까지 아기 포대기, 기저귀, 멍석이나 푸대, 바구니 등의 떨어진 곳을 깁는데도 사용되었습니다.

 

 

제주의 음식문화

제주도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외부 음식문화의 영향을 적게 받았습니다. 특히 해녀들이 잡아온 해산물을 이용한 독자적인 음식문화를 형성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은 소라, 전복, 성게, 해조류 등의 재료로 만든 음식이 많은 것이 특징입니다.

자연 그대로의 제주음식

제주도에서는 다른 지방과는 달리 밥을 사람 수대로 뜨지 않고 큰 그릇(낭푼)에 담아 온 가족이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이는 농사일과 물질을 함께 하는 제주 여인들의 바쁜 일손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풍속입니다.

 

제주 음식의 조리법

제주의 음식은 복잡한 조리법이나 다양한 식재료를 사용하기보다는 풍부한 해산물을 재료로 하여 간단한 조림이나 된장을 풀어서 만드는 냉국 등 소박하면서도 재료의 본 맛을 살리는 음식을 주로 만들어 먹었습니다.

 

물허벅과 지세항아리

제주도는 화산섬인 까닭에 도자기 원료가 없어 도자기 생산이 어려웠습니다. 제주옹기가(家)는 제주도 특유의 화산회토(火山灰土)를 이용하여 만들었으며, 항아리, 독, 물허벅, 그물추, 문어통 등 일상생활에 밀접한 생활용기로 사용되었습니다.

물이 귀한 제주에서는 빗물을 항아리에 저장하여 식수로 사용하기도 하며, 용천수가 있는 해안가에서 물을 길어오기도 하는데, 이때 제주여성들이 등에 지고 물을 길어 나르는 물동이를 ‘물허벅’이라 합니다. 물허벅은 물이 쏟아지는 것을 방지하고, 운반할 때 손잡이로 이용하기 쉽게 부리를 좁게 만들었으며, 이런 허벅을 장방형의 대나무 바구니에 넣어서 등에 지고 물을 길어 날랐습니다. 허벅으로 길어온 물은 부엌에 있는 지세항아리에 부어 사용합니다.

 

해신당과 굿

해녀들의 속담 중에 ‘저승에서 벌어 이승에서 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해녀의 물질 작업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해녀들은 언제나 바다를 관장하는 용왕신에게 의지합니다. 해녀들은 수시로 바닷가에 있는 해신당에 찾아가 제물을 준비하여 물질 작업의 안전과 풍요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영등달인 음력 2월에 영등신을 위한 영등굿을 합니다. 영등신은 해상의 안전과 해녀와 어부들에게 풍어를 가져다준다고 믿는 신으로 음력 2월 초하루 제주도로 들어와 바닷가를 돌면서 미역, 전복, 소라, 천초 등의 씨를 뿌려 해녀들의 생업에 풍요를 주고 같은 달 15일 우도를 거쳐 본국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잠수굿

음력 3월 8일 제주시 구좌읍 동김녕리에서 진행되는 잠수굿은 영등굿과 별개로 행해지는 굿으로 제주도 해녀들의 대표적인 의례이며 축제입니다. 해녀들은 1년 동안 비용을 마련하고 제물을 준비하는 등 생업과 의례가 하나가 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의례 과정에서 ‘요왕맞이’는 바다를 관장하는 요왕(龍王)을 맞아들여 풍어와 무사고를 기원하는 제차이며, ‘씨드림’은 해녀들의 채취물인 전복, 소라, 우뭇가사리, 톳 등의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좁씨를 바닷가에 뿌리는 의례입니다.

 


제2전시실; 제주해녀들의 바다 일터와 역사, 공동체

제2전시실은 제주해녀들의 바다 일터와 역사, 공동체를 알 수 있습니다. 언 몸을 녹이고 물소중이를 갈아입는 불턱을 중심으로 테왁망사리, 눈, 빗창 등의 작업도구, 물소중이와 고무옷을 비교하여 전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해녀의 역사, 제주해녀 항일운동, 해녀 공동체에 관한 각종 문서 등과 사회공익에 헌신한 해녀들의 사진과 영상자료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불턱

굴묵

제주는 다른 지역과 달리 부엌 아궁이에서 불을 때어 난방을 하지 않고 별도의 난방장치를 두는데 이를 ‘굴묵’이라고 합니다. 말과 소가 많았던 제주에는 굴묵 땔감으로 소똥, 말똥 말린 것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말과 소의 똥을 굴묵 안으로 집어넣고 지푸라기로 불을 지펴 두면 서서히 타 들어가면서 방이 뜨거워집니다.

 

해녀의 일터

불턱, 제주해녀의 물옷과 물질도구, 해녀의 역사, 물질 기술, 해녀 공동체 등 해녀의 일터와 역사를 전시한 공간입니다.

 

불턱

불턱은 해녀들이 옷을 갈아입고 바다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곳이며, 작업 중 휴식하는 장소입니다. 둥글게 돌담을 에워싼 형태로 가운데 불을 피워 몸을 덥혔습니다. 이곳에서 물질에 대한 지식, 물질 요령, 바다밭의 위치 파악 등 물질 작업에 대한 정보 및 기술을 전수하고 습득하며 해녀 간 상호 협조를 재확인하고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제주도 해안에는 마을마다 3~4개씩의 불턱이 있었으며 현재도 70여 개의 불턱이 남아있습니다. 1985년을 전후하여 해녀 보호 차원에서 마을마다 현대식 탈의장을 설치하였는데 개량 잠수복인 고무옷의 보급에 따라 온수목욕시설이 갖추어진 탈의장은 필수 시설이 되었으며 불턱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해녀의 물질도구

'족쉐눈', 해녀들이 물질할 때 쓰는 쇠로 만든 알이 두 개인 물안경. 우측은 전복을 채취하는 도구인 '빗창'

해녀가 물질할 때 사용하는 도구는 물안경, 테왁망사리, 빗창, 까꾸리 등이 있습니다. 물안경은 20세기에 들어서 보급되었으며, 테왁은 부력을 이용한 작업 도구로 물속의 해녀가 그 위에 가슴을 얹고 작업장으로 이동할 때 사용합니다. 테왁에는 망사리가 부착되어 있어 그곳에 채취한 해산물을 넣어둡니다. 빗창은 전복을 떼어내는 데 쓰이는 철제 도구이며, 까꾸리는 바위의 해산물을 채취하거나 물속에서 돌멩이를 뒤집을 때 또는 물밑을 헤집고 다니거나 바위에 걸고 몸을 앞으로 당길 때 사용하는 등 가장 많이 이용합니다.

개량 해녀옷 ‘고무옷’

현재 해녀가 입는 고무옷은 1970년대 초 일본에서 들어온 것입니다. 고무옷은 목까지 내려오는 통으로 된 ‘모자’와 고리가 달린 ‘상의’, 그리고 발목을 덮고 가슴까지 올라오는 바지 형태의 하의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기에 ‘오리발’이라고 부르는 물갈퀴를 발에 신고 작업합니다. 스펀지 형태의 고무옷은 부력이 있어 ‘연철’이라는 납추를 몸에 매달아야만 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고무옷이 등장하면서 해녀의 작업환경이 크게 변하였습니다. 이전에는 작업하던 시간이 30분에서 1시간 내외였으나, 고무옷을 착용하면 3시간에서 5시간을 넘게 작업할 수 있으며, 더 깊은 곳으로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이전보다 몇 배의 수확을 올리고 있으나 잠수병 등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2012년부터 바다에서 작업하는 해녀들을 쉽게 찾기 위하여 옷 색깔이 오렌지색인 고무옷을 보급하고 있습니다.

제주해녀의 물옷과 물질도구

제주 해녀가 물질을 할 때 입는 옷을 ‘물옷’이라고 부르는데, 과거에는 ‘물소중이’(하의) ‘물적삼’(상의), 머리카락을 정돈하는 ‘물수건’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1970년대 초부터는 해녀들이 이른바 ‘고무옷’이라고 부르는 잠수복을 입었는데, 이 옷으로 장시간 작업이 가능해졌으며 능률도 크게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밖에 해녀가 쓰는 도구로는 물안경, 테왁망사리, 빗창, 까꾸리 등이 있습니다. 제주특별자치도에서는 2008년 해녀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해녀의 물옷, 도구 등 15점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재 민속자료 제10호로 지정하였습니다. 이들 문화재는 제주 해녀문화와 여성 연구의 필수 자료가 되고 있으며, 제주 해녀의 문화를 국내외에 홍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숨비소리

숨비소리는 해녀들이 잠수한 후 물 위로 나와 숨을 고를 때 내는 소리로 마치 휘파람을 부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는 약 1분에서 2분가량 잠수하며 생긴 몸속의 이산화탄소를 한꺼번에 내뿜고 산소를 들이마시는 과정에서 “호오이호오이” 하는 소리가 납니다. 해녀들은 ‘숨비소리’를 통해 빠른 시간 내에 신선한 공기를 몸 안으로 받아들여 짧은 휴식으로도 물질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물질 기술

물질 기술은 오랜 시간의 수련과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기술로 보통 8살부터 마을의 얕은 바다에서 헤엄과 잠수를 익혀 15세 무렵에 애기 해녀가 됩니다. 신체적 조건으로 폐활량, 수압에 견디는 눈과 귀, 찬물에서 견딜 수 있는 능력 등이 필요하며 커다란 바다생물을 만났을 때 당황하지 않는 담대함도 필요합니다. 제주해녀들은 불턱에서 바다에서의 효과적인 체력 운용과 바다에 대한 지식을 끊임없이 선배 해녀들로부터 전수받으며 기량과 지혜를 확장해갔습니다.

 

해녀공로비 

해방 직후 제주도의 실정은 4·3사건과 6·25전쟁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했습니다. 1946년에 온평교 설립 인가를 받았으나 학교 운영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1950년 화재로 전 교실이 소실되자 성산읍 온평리 해녀들은 신산리와 신양리 양쪽 경계 바다를 ‘학교바당’으로 삼아 미역을 채취한 수입금 전부를 학교건립자금으로 헌납하여 1951~1958년에 걸쳐 학교를 재건하였습니다. 이후 학교 기성회에서는 1961년 온평초등학교에 공로비를 세워 해녀들의 공덕을 기리고 있습니다.

 

해녀 공동체

물질 작업은 공동체적인 성격이 강합니다. 함부로 바다에 뛰어들어 혼자 물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정해 놓은 규약과 법에 따라 행동합니다. 물질은 언제나 공동으로 작업에 임하게 되며, 어려움에 처했을 때 공동으로 위험상황에 대처할 수 있습니다. 해녀들은 혼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구한말부터 ‘계’의 형태로 자생적인 공동체가 이루어졌으며, 이후 출가 해녀의 권익보호를 목적으로 어업공동체가 조직되었습니다.

해녀들의 바다밭

바다밭의 관리와 마을어장 규약을 어촌계, 해녀회 단위로 정해놓고 운영하고 있습니다. 제주도에는 수산업협동조합에 소속된 마을 단위의 어촌계가 100개 있는데 해녀들은 어장을 ‘바다밭’이라고 합니다. 각 어촌계는 어장의 경계, 해산물의 채취 자격, 해산물 종류에 따른 채취 방법과 채취기간 및 금채기간 등 제주해녀의 물질 관행을 마을, 어촌계, 해녀회 단위의 규약으로 정해 놓고 엄격하게 운영하고 있습니다.

 

해녀 공동체의 위계질서

해녀들은 연령과 물질 기량, 덕성에 따라 상군, 중군, 하군으로 나뉘며, 불턱에서도 해녀의 지위에 따라 자리가 정해지는 등 엄격한 위계질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해녀 공동체에서는 연장자의 의견을 존중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웃어른은 그만큼 해녀사회의 귀감이 됩니다.

 

사회 공익에 대한 헌신과 참여

제주해녀들은 예전부터 물질을 통해 얻은 수익으로 기금을 조성하여 마을 안 길을 정비하거나 학교 건물을 신축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바다의 한 구역을 정하여 거기에서 나오는 수익금 전액을 마을일에 수고하는 이장에게 주는 ‘이장바당’, 자녀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의 육성회비를 충당해주는 ‘학교바당’ 등도 있었습니다. 1950년 화재로 전 교실이 소실된 성산읍 온평리 해녀들은 마을의 한쪽 바다를 ‘학교바당’으로 삼아 미역을 채취한 수입금 전부를 학교건립자금을 헌납하여 1951~1958년에 걸쳐 학교를 재건하였습니다.

항일운동의 해녀 대표 5인

제주해녀 항일운동은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고순효(본명 고차동), 김계석 5인의 해녀 대표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이들은 혁우동맹 산하 하도강습소 1기 졸업생들로 야학을 통해 민족교육을 받았으며, 청년 민족운동가들과 연계하여 제주해녀 항일운동을 단순한 생존권 투쟁의 차원에서 항일운동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데 공헌하였습니다. 이들은 일제 경찰의 폭력진압에 의해 동료 해녀 30여 명과 함께 구속된 이후에도 자신들이 주모자임을 자임하여 동료 해녀들을 석방시키는 등 제주해녀 항일운동을 이끈 해녀 대표로서의 역할을 다하였습니다.

 


제3전시실; 제주해녀들의 생애

제3전시실은 해녀들의 생애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첫 물질부터 상군해녀가 되기까지의 모습, 출가물질 경험담, 물질에 대한 회고 등 해녀들이 전하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영상을 통해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물질하며 틈틈이 만든 해녀들의 솜씨와 자랑스러운 해녀들의 얼굴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해녀작업장 창문 너머 힘차게 물질하는 해녀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테우

테우(터배, 떼배)는 선사시대 인류문명의 발상지인 강 유역에서 부족 간의 물자 이동에 이용해 온 원시 배입니다. 이 배는 제주 연안에서 고기잡이, 해조류 채취뿐만 아니라 해녀들의 이동수단으로 사용했던 전통배로 제주인들의 삶의 산물이며 해양문화의 값진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입니다. 여기 전시된 테우는 1997년 10월 제주에서 일본 나가사키까지 한·일 고대뱃길탐험(탐험대장 채바다)을 진행했던 천년2호입니다.

 

물때와 바람

물때와 바람은 물질, 고기잡이, 농사 등 생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물때는 조수간만의 차를 일컫는 말로 고기잡이를 나가거나 해녀들이 물질을 나갈 때 물때를 보고 조업시간을 정했습니다. 또한 바람이 많은 제주에서는 어느 곳이나 돌담을 쌓아 바람을 막음으로써 태풍이나 큰바람으로부터 집을 보호하고 농산물의 피해를 막았습니다.

 

해녀들이 채취하는 해산물

해녀가 채취하는 해산물은 수심별로 미역, 전복, 오분자기, 조개, 전복, 소라 등 다양하게 분포되고 있습니다. 최근 기후변화 등에 의한 수온 상승으로 제주해역의 해수 온도는 지난 86년(1924~2009년) 간 평균 수은이 15℃ 상승하여 해양환경이 많이 변화되고 있습니다.

 

해녀작업장

해녀작업장은 물질 나가기 전 불을 쬐며 물질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입니다. 물질도구를 보관하고 손질하며, 성게 작업 후 성게알을 까기도 하고, 채취한 해산물의 무게를 측정하는 등 불턱이 변화된 장소입니다.

 

물질하던 손으로 곱게 지어낸 살림살이

해녀의 바깥물질은 전복이나 소라 등 경제적 환금이 가능한 상품을 채취하는 해녀의 노동력에 대한 경제적 가치 인식이 불러온 행위였습니다. 바깥물질을 해서 열심히 번 돈은 자기 자신이 아닌 가족을 위해 썼습니다. 해녀들은 날씨가 궂어 물질을 못하는 날이나 물질하면서 틈틈이 살림에 필요한 물품들을 손수 만들어 두기도 했습니다.

 

제주해녀의 유산

제주해녀는 자연과 공존하는 생태적 조업방식, 생태 환경에 대한 민속 지식과 세대 간의 문화 전승, 주체적 여성 문화, 배려와 질서의 공동체 등 독특한 문화를 이룩했습니다. 해녀는 이러한 점을 인정받아 국내외에서 다양한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제주해녀문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인증서

제주해녀 헌장

제주해녀는 제주인의 자랑이다. 제주해녀는 대한민국의 자부심이며 세계 해양문화의 꽃이다. 우리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다짐한다.

하나, 우리는 생활의 터전인 제주바다를 사랑하고 아끼며 ‘자연과 공생하며 이웃과 상생하는 삶’을 지향한다.

하나, 우리는 불턱에서 싹 틔운 공동체 정신을 키우며 ‘배려와 공존의 미덕’을 추구한다.

하나, 우리는 해녀문화유산과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고 ‘'해녀문화의 보존과 전승’을 위하여 노력한다.

하나, 우리는 제주바다에서 숨비소리가 계속 들릴 수 있도록 ‘후배 해녀의 육성’에 앞장선다.

하나, 우리는 제주해녀문화의 가치를 인식하고 ‘세계화’를 위해 노력한다.

 

 


다시 해녀박물관 입구 전시장으로 돌아옵니다.

느긋하게 입구 전시장을 둘러봅니다.

 

여자, 162×260cm

얼마나 깨어지고 부서졌는지 모른다. 얼마나 파도에 더 깎여야 삶이 완성되는지 알 수 없다. 떨어져 나간 살점이 바다의 새로운 생명이 된다. 물숨일랑 쉬지 마라. 닻줄을 끊고 올라 숨비로 다시 호흡한다. 살암시민 살아진다.

 

떼, 245×122cm

해안가를 쓸려 다니는 유목과 바닷속을 무리 지어 다니는 물고기 떼, 그리고 군중 속에 이리저리 쓸려 다니는 인간의 군상까지 우리 모두의 시간은 이렇게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名(명), 190×193cm

해질 무렵, 바다에 나가면 바다가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바다가 부르는 내 이름. 하나의 이름이 아니라 어느 땐 길고 어느 땐 짧다. 어느 땐 크고 어느 땐 작다. 부드럽다가도 거칠고, 차갑다가도 따뜻하다. 바다가 부르는 내 이름. 위로의 이름.

 

 

해녀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탁 트인 넓은 잔디밭이 반깁니다. 높고 푸른 하늘, 가슴이 시원해집니다. 참 좋은 날입니다.

 

 

소나무에 걸린 풍경 소리가 제주해녀들의 숨비소리처럼 들립니다. 쾌청한 하늘, 느긋한 관람 시간, 모든 게 여유롭습니다. 행복한 시간입니다.

 

 

해녀박물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해녀박물관길 26

지번; 구좌읍 상도리 3204-1

064-782-9898

 

 

사족

오늘 아침은 어제 제주 서귀포 매일올레시장에서 산 갈치 몇 마리로 갈치조림을 만들었습니다. 큰 냄비에 손질한 갈치를 모두 넣어 조리는데, 작은 인덕션이 큰 냄비를 감당치 못합니다. 자작하게 조려져야 하는데 마치 갈치탕처럼 국물이 겉돕니다. 간이 적절히 밴 무조림이 그나마 먹을만합니다. 그 작은 인덕션에 큰 냄비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있게 먹어준 형제들에게 뒤늦게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이제 제주의 진정한 맛, 전복죽의 끝판왕을 찾아 나섭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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